오랜만에 시리즈 재개합니다. 역시 한 달에 한 번 연재는 저에게는 너무나 거대했던 것…
이번 편에서는 이뜨레의 햇병아리 시절로 돌아갑니다. 개발협력에 대해 모른 채 그저 열정 하나 달랑달랑 들고 왔던 때입니다. 갈팡질팡 이뜨레의 실수담을 감상해보시겠습니다.
아무도 불러주지 않아 제 발로 다시 나타났다
1. 진짜배기를 찍어내는 법 – 스케일업과 진정성에 대하여
2. 이거 좋은 일 맞나요? – 사업의 역효과에 대하여
3. 감사하지만 그 도움 사양하겠습니다 – 현장성에 대하여
4. 삶과 죽음 앞에서 – 소셜 미션과 기업의 생존에 대하여
5. 대한민국과 새마을운동 – 바람직한 조직문화에 대하여
(바뀔 가능성 높음)
뜨거웠던 청년 이뜨레
몽골로 파견나가기 전, 저는 한국에서 경영학 대학원을 다니고 있었습니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살짝 많은 나이에 대학원을 들어갔는데, 대기업이 일하는 방식에 실망하기도 했고, 비즈니스로 선한 영향력을 펼치는 방법을 배우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막상 시작한 공부는 저의 고민과는 거리가 있어 성에 차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소셜벤처 경진대회가 열린다기에 반가운 마음에 대학원 동료들과 함께 팀을 꾸려 참가를 했습니다.
마땅한 아이템이 없던 저희는 당시 핫했던 G-saver를 개량해보기로 했습니다. G-saver는 한 국제개발 NGO에서 만든 몽골의 난방기구로, 이미 대한민국 1호 적정기술 제품으로 이 분야에서 이름이 나있었습니다. 기관의 담당자에게 연락을 드려서 승낙을 얻은 후, 제품의 기능을 개량하고 사회적기업 비즈니스모델을 개선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좋은 아이템에 팀원들의 노력이 더해져 아시아 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외부에서는 칭찬을 받았던 저희 PT가 정작 본래의 수행기관으로부터는 열렬한 환영을 받지 못했습니다. 기쁨과 성취에 들뜬 저희와 다르게 기관 담당자는 ‘학생들이 수고가 많았네요’ 정도의 미적지근한 반응이었습니다. 무려 최우수상을 받은 우리의 제안에 따라 제품을 개량하고 비즈니스 모델을 도입할 줄 알았는데 예상과 반응이 다르자 자존심이 약간 상했던 한편, 대체 현장은 어떤지 알고 싶었습니다. 분명 현지를 오가며 오래 일을 해온 전문가들의 눈으로 보기에는 저희가 부족함이 있었을 터, 그게 무엇인지 알고 싶었습니다. 이리하여 이뜨레는 파견을 지원하였습니다. 대회 수상이 목표가 아니라 실질적 임팩트 창출이 목적이었으니, 몽골에 가는 것은 어려운 결정이 아니었습니다.
책상과 현장의 괴리
기획은 탄탄한 현실에 발을 디뎌야 합니다. 겉이 번드르르한 기획서가 현실과는 따로 놀 수 있습니다. 개발협력 분야는 데스크와 필드의 거리가 멀어서 더욱 그렇습니다. G-saver에 대한 저희의 제안서가 바로 그런 경우였습니다. 저희는 몇 가지 큰 실수를 했습니다.
첫째, 현장 파악이 부실했습니다. 소비자들의 세밀한 니즈나 몽골 특유의 사업환경을 알지 못한 채 기획한 솔루션들은 한끗씩 부족했습니다. 탄소배출권을 엮어서 수익을 창출해내는 아이디어를 냈지만, 당시 몽골에서는 탄소저감량을 측정하고 인정받는 절차가 복잡다단하여 비용과 인력이 많이 필요하며, 그 과정을 성공적으로 진행하더라도 돈이 실제 입금되기는 힘들다는 것이 다른 사례를 통해 드러났습니다. 책상 위에서 기획된 아이디어는 현실성이 많이 부족했습니다.
미생의 명대사: “역시 현장이지 말입니다”
둘째, 현지에서 필요로 하는 업무의 우선순위가 달랐습니다. 비즈니스 모델 고도화보다 더 중요한 문제들이 산적해 있었습니다. 말썽 피우고 문제되는 직원을 정리하는 일, 시간관리가 몸에 익지 않은 유목민 출신 직원들의 정시 출퇴근이 잘 이루어지도록 관리하는 일, 지출 규정을 수립하는 일, 약속된 물량을 생산해내고 필요한 사람들에게 보급하고 소비자 불만에 대응하는 일 등등, 급하고 중요한 업무는 많은데 일손은 너무 달렸습니다. pain point는 fancy한 기획서가 아니라 흙 묻혀가면서 현장에서 뒹굴 파견자의 부족이었습니다. 기획의 부족은 업무의 병목점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G-saver가 국내에서 유명해지고 나서는 사방에서 온갖 제안이며 조언들이 밀려들고 있었는데, 대부분의 제안은 안타깝게도 저희 팀과 비슷한 실수를 하고 있었습니다. 마음만 뜨거운, 디테일은 부족한. 사업에 도움이 되지 않는.
마지막으로 부족한 것은 저의 전문성이었습니다. G-saver를 개량한다고 야심차게 시도했지만, 실제 작동 원리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작업한 것이었습니다. 현장에서 연구를 수 개월 하고나서야 알게 된 사실은 G-saver가 온기를 보존하는 원리가 저희가 생각했던 것과 달랐다는 사실입니다.
엉터리 엔지니어의 수난
저희는 난로에 올려놓는 G-saver가 마치 한국의 온돌바닥과 같이 뜨끈뜨끈하게 열을 보관했다가 서서히 방출하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기기에 내장된 온기가 천천히 방출되어 방을 따뜻하게 유지시키는 축열기로 이해한 셈입니다. 그렇지만 그건 착시였을 뿐, 실제 메커니즘을 달랐습니다. G-saver는 배기의 흐름을 조절함으로써 석탄이 빠르게 타버리는 걸 방지하는 연소 조절 장비였습니다. 난로와 곧장 하늘로 뻗은 연통 사이에 G-saver를 배치하니 배기의 흐름이 조절되어 난로가 적당한 속도로 작동되던 겁니다. G-saver 자체가 덥혀져서 열을 보관하는 영향도 있기야 했겠습니다만, 연소 조절의 효과에 비하면 아주 미미한 정도로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저희는 G-saver의 열 보관 기능을 더욱 높이기 위해서 축열재료를 바꾸는 일에 집중했습니다. 현장에서 실험을 반복하면서, 축열 성능을 아무리 높여도 효과가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겨우 알 수 있었습니다. 난로에 대한 경험이 많은 기술자가 봤다면 초반에 쉽게 해결했을 일입니다.
결국 3년간 몽골에서 사업을 진행하면서 최초 제안서가 기여한 부분은 아주 적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일이 제대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현장에 파견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100명의 조언가보다 1명의 현장활동가가 중요합니다. 원격 지원이나 출장으로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고민을 거듭해가며 손에 흙 묻히기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땀냄새 폴폴 풍기며 자신의 전문성을 차곡차곡 쌓아올릴 사람이 필요합니다.
흙은 손에 묻히면 된다는 것을 몰랐다
기업 운영에는 기업 운영의 전문성이, 제품 개발에는 제품 개발의 전문성이 필요한 법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현지의 수준을 얕잡아보는 마음이 깔린 나머지 필요한 전문성을 간과하며, 우리가 적당히 해줘도 사람들의 삶이 쉽게 바뀌리라 생각합니다. 적당히 해줘서 의미있는 결과가 나온 경우는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는 재능기부 내지 프로보노 활동은 한계가 명확하다고 생각합니다. 올인하고 현지에 가는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 이 개발협력 씬에 더 많이 나오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