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는 산 중간이나 정상 부근을 지나도록 깎아내 이쪽 능선에서 저쪽 능선으로 굽이굽이 이어져 있었다. 그렇게 어딜지 모르는 끝을 향해 달리다보면 가끔씩 마을이 하나 나왔고 또 달리다보면 다시 마을이 하나 나왔다. 짧으면 3-40분에 마을 하나, 길면 1시간을 넘게 달려야 마을이 나타났는데 마을 외에는 사람이 거주하는 모양새의 집은 좀처럼 찾을 수 없었다. 황토색 흙과 아무렇게나 우거진 수풀들, 그리고 빽빽한 나무들 뿐이었다.
이 거친 길을 사람들은 걸어다녔다. 일반 승용차는 거의 들어올 수 없는 곳이기 때문에 차량을 본 것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오토바이가 있으면 오토바이를 타고 다녔지만 그것도 없으면 그냥 걸어다녔다. 앞쪽으로는 아이를 메고 등에는 짐을 한 가득 지고, 한 손에는 걸을 수 있는 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식이었다. 그냥 다녀도 힘든 길인데 30도가 넘는 더위에 습도도 높은 숲길을 그렇게 걸어다녀야 한다는 것은 생각만해도 아찔한 일이었다. 사탕수수를 베어물고 대나무통에 농작물을 가지고 어디론가 향하는 어린이들도 만났고 할머니와 손주뻘 되는 여자아이가 짐을 가지고 다니는 모습도 보았다. 마땅한 교통 수단이 없으니 짐을 가지고 걸을 수밖에 없다. 우리를 지나쳤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나무로 만든 바구니를 메고 있었고 그렇게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혹은 벼농사를 짓는 자신의 화전으로 걸어다녔다.
도로가 산 중턱이나 정상을 위주로 나 있다보니 천연 라오스의 경치를 감상할 수 있었다. 도로와 같은 높이로 구름이 다녔기 때문에 안개가 덮인 것처럼 구름 사이로 다니는 경우도 있었고 구름 위를 달리는 경우도 있었다. 가끔 구름이 없는 탁트인 공간이 나타나면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이런 천혜의 자연을 눈을로 볼 수 있다는 것에 감탄을 연발하였다. 이럴 때는 차에서 내리지 않을 수 없다. 발 아래로는 녹색의 산이 산맥을 이뤄 끝없이 넓게 펼쳐져 있고 하늘에는 우기의 꾸덕꾸덕하고 새하얀 적란운이 한데 만나 장관을 이루고 있는데 이걸 보고도 무심히 차를 운전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차에서 나와 영문모를 기념 사진을 찍었다.
기념 사진을 찍으며 산을 유심히 살펴보니 산 중간중간에 골프장 잔디처럼 굉장히 깨끗한 부분이 눈에 띄었다. 높은데서 내려다보는 것이니 분명히 작게 보이는 것일텐데도 엄청나게 넓었다. 하나같이 짙푸른 잔디가 심겨져 있는 것처럼 깔끔했는데 인적도 없는 곳에 골프장이 있을리는 없으니 무엇인지 궁금했다. 반장님은 ‘화전’이라고 했다. 화전이라면 1950년~60년대 정도에 강원도 산골에서 한다더라정도의 이야기를 교과서에서나 봤던 그 화전이었다.(*) 한 번도 정체를 본 적이 없었는데 한국도 아니고 여기 라오스에서 화전을 보게될 줄은 몰랐다.
산속에 심어져 있던 것은 벼였다. 라오스 산간에서는 필리핀 계단논처럼 물을 대지 않고 벼 농사를 짓는다. 밭에 농작물을 심듯 산에다 벼를 심으면 그 벼라 잘 자란다. 이렇게 기를 벼를 밭벼라고 한다. 우기에는 비가 매일 쏟아지기 때문에 물은 풍부하다. 물론 낮은 지역에서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물을 가두어 농사를 짓는다. (이것은 논벼) 하지만 국토의 80%가 산악 지역이다보니 어떻게든 식량을 자급하려면 화전을 안 할 수는 없었다. 산 아무데나 불을 질러놓고 올해는 이쪽만 쓰고 다음해는 저쪽을 쓰는 등 지력을 아끼기 위해 여러가지 방법을 쓰고 있기는 하지만 어떻게 하든 삼림의 파괴와 경작지의 황폐화는 막기가 어렵다.(**)
한국이 1ha에 5t 정도의 쌀을 수확하는데 비해 라오스 산간지역 화전에서는 많아야 1.5t 정도밖에는 수확을 하지 못한다.(***) 1ha (약 3천평) 정도면 4명이 작업하는 넓이인데 집안에 남자가 없다면 여자 아이들도 나와서 농사를 거든다. 길을 지나다가 만난 대부분의 아이들이 10세 내외였던 것을 생각해 본다면 대부분은 학교가 아니라 부모를 따라 농사를 지으러 다니는 것이었다. 여기서 나오는 소출도 제각각이므로 사실상 농사를 지으면 내다 팔기는 커녕 자급으로 다 소진된다.
화전을 일구는 대다수가 소수민족이고 라오스 빈곤 최하위층으로 1년에 400달러 정도의 수익을 거두고 있다. 언뜻 생각해도 1년에 400달러로 생활한다는 것이 말이 안 되는 수준인데 이곳 사람들은 대부분 농사와 수렵 생활을 하고 있다. 라오스 1인당 GDP가 1,800달러 정도라는 걸 감안하면 굉장히 낮은 수치를 넘어 극심한 빈곤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산에서 살아가는 삶의 모습을 한 가지로 일반화시킬 수는 없지만 그런 이유로 이 지역 많은 사람들의 관심사가 ‘어떤 작물을 키워야 돈으로 바꿀 수 있는가’이다. 즉 환금성 작물을 키우는 것이 중요한 부분이었다. 국가차원에서 소수민족과 화전민들을 대상으로 여러가지 정책들을 제공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잘 먹혀들지 않아서 누구나 납득할만한 상황이 되려면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우리가 폰통 디스트릭에 가는 이유도 이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산속 깊은 도로의 위태로움과 평온한 화전의 정경을 뒤로하고 본격적인 오프로드로 접어들려는 순간 (아직 본격 오프로드가 아니었음) 비포장이지만 깔끔하게 롤링된 도로를 만났다. 이 반장님은 크게 당황하면서 “아니, 여기서부터 폰통까지 이렇게 포장된 도로가 아니었는데 언제 이렇게 바꼇지?”라며 감탄에 감탄을 연발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가 지금까지 지나온 길보다 훨씬 더 쾌적하고 깔끔했고 평탄화가 잘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불과 몇 주 전만해도 이런 길이 아니었다고 한다. 달리면서 관찰하니 도로 위에 자갈을 새로 올려서 모래로 빈틈을 메꾸고 커다란 롤러가 몇 번 정도 꾹꾹 눌러서 평탄화를 한 것이 분명했다. 한참을 달리다보니 중장비들이 한켠에 주차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 정도 도로만 뚫려도 비포장 길을 달리는 수고가 한참은 줄어들 것이다.
험난하고 매끈했던 길고 긴 오프로드가 끝나는 지점에 폰통 디스트릭이 있었다. 여기에서 조금 더 가면 베트남 국경이다. 몇 백 가구가 모여 사는 마을이라 관공서도 있고 전기도 LTE도 잘 터진다. 큰 공터 옆에는 시장이 있었고 우리가 찾아온 목적지는 시장 바로 옆 건물에 있었다. 우리는 짐을 내리고 곧장 실내로 들어갔다. 나는 카메라와 장비를 챙겨 실내로 들어갔다. 대나무와 벽돌로 세운 벽체에 지붕이 얹어져 있는 단순한 구조여서 햇볕이 내리쬐는 뜨거움이 없을 뿐 실내는 훅훅쪘다. 수 십 명의 여성들과 몇몇 아이들, 그리고 루앙프라방에 있는 수파노봉 대학의 농과 대학 교수님들이 한데 어우러져 엄청난 열기를 뿜으며 교육에 열중하고 있었다. 이 공간의 더위가 한 낮의 더위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온 몸으로 체감할 수 있었다.
참고자료
*한국의 화전은 1979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종료되었다.
** http://www.intagrijournal.org/journal/article.php?code=14293#h1356797245382
***a http://odakorea.go.kr/ODAPage_2012/T02/cps/pdf/CPS_Laos.pdf